하나님의 선교
일상 속에 모든 영역에서 선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제 가정이 하나님의 선교를 꿈꾸고 세우고 뻗어가고 살아가려 합니다.
1. 선교적교회란?
1) 선교는 교회의 본질
선교적 교회는 선교 행위(doing mission)가 아니라 교회 자체가 선교가 되는 것(being mission)이다.
곧 교회가 선교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교회가 단지 활동 또는 사업에만 초점을 둔다면 그 활동 또는 사업을 하는 동안에만 선교를 행할 분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는 선교와 상관없이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교회 자체가 선교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자체가 교회라면 선교는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지 않게 된다.
2) 자신의 삶에서 선교적 직무를 수행하는 평신도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는 결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며 세상 가운데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자체를 뜻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교적 사명을 주셨으며,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안이 아니라 세상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의 선교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선교적 교회는 진정한 선교를 위해 평신도들이 자신의 삶에서 선교적 직무를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일깨우고 훈련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3) 지역사회와의 선교적 교감
선교적 교회는 선교를 지리적으로 구분하지 않으며 지역사회를 선교의 핵심 영역의 하나로 여긴다.
선교를 지리적 관점으로 인식하던 시대는 지났다. 선교를 지리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자신에게서 가장 먼 땅은 자신이 서 있는 바로 옆이다. 이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바로 그 자리(가정,직장,학교 등), 교회의 관점에서는 교회가 위치한 그 지역사회가 중요한 선교현장이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4) 공적 제자도의 실천
과거 패러다임 안에 있는 교회는 단지 개인구원과 영혼구원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에서 드러내야 할 복음의 공적 역할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가 단지 교회에 제한되지 않고 세상과 만백성에 미치고 있고, 그분이 세상의 변화와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공적 제자도의 선교적 중요성을 다시한번 일깨워 준다. 그것은 정치,경제, 문화 등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포함한다. 물론 이와같은 공적 제자도를 실천하는 방식은 자신의 신앙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을 통해 얼마나 사회가 복음적으로 갱신되고 변화될 수 있는지 철저하게 따져보는 것은 중요하다.
5)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지향하는 교회
선교적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성장을 지향하는 교회이다. 신약성경에서 초대교회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교회는 성령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유에 속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교회 곧 하나님의 백성에게 선교적 사명을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선교는 교회보다 우선한다.” 그렇지만 그 선교는 다시 하나님께 속한다. 왜냐하면 선교를 행하는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성부는 파송하셨으며, 성자는 스스로 선교사가 되어 이 땅에 오셨고, 성령은 능력을 통해 선교를 지금도 이끌어 가신다. 교회는 단지 삼위일체 하나님이 행하시는 선교의 도구일 뿐이다.
2. 문화 속으로 파송받은 ‘선교적 교회’
“우리의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에서 나오며, 하나님의 선교는 그 분의 세상 전체-진실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를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는 하나님의 선교라는 원대한 흐름 속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선교목표(장기목표, 당면한 목표)가 하나님의 선교 목표와 일치하도록 해야 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주장이다 그는 현대교회들이 교회의 본질적인 목적인 선교적 과업을 단지 프로그램이나 사역의 한 부분으로 여긴다고 비판했다.
3. 선교적 교회의 강조점은 ‘친밀성’과 ‘소통’
선교적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소통과 교통이 선제되고 강조되어야 한다고 본다. 선교적 교회의 전제는 성령의 내재성,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친밀성과 교통이다. 선교적 교회론이 삼위일체론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신학적으로 훌륭한 점이다. 그러나 삼위일체 신학의 핵심을 이루는 소통의 신학이 없으면 삼위일체론은 중심의 다이내믹을 잃게 된다. 소통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양식이며 경영방식이다.